[책] 동정없는 세상, 박현욱 저, 문학동네 Book

동정없는 세상
박현욱 저
문학동네

<아내가 결혼했다>를 재미있게 읽어서 찾아 보게 된 책.
박현욱의 책은 일단 재치있고 발칙하다.
이 책의 <동정없는 세상>이라는 제목 자체가 중의적 의미인데, 한때 누벨 이마주라고 불리웠던 프랑스 영화 사조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에릭 로샹의 제목을 차용하고 있는 동시에 성경험이 없다는 의미인 '동정'을 의미하고 있으며 동시에 사회적 '동정'이 없는 사회를 말하고 있기도 하다. 


박현욱의 재치있는 문체는 곳곳에서 빛을 발하는데, 이 소설은 '한 번 하자'라는 대사로 시작해서 그 대사로 끝이 난다. 언뜻 수능이 끝난 고3 학생의  성 탐구기같이 시작하는 일종의 성장 소설이지만 이 책은 과거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담고 있기 보다는 보편적인 삶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물론 이 소설은 '한국'이라는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느낄만한 입시 위주의 교육 현실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고 있기도 한데 굳이 그런 모순을 꼬집기보다는 살아가는 삶의 한 부분으로 담아낸다. 하지만 그런 태도들이 어쩌면 보통 인간들이 느끼는 감정의 수위로는 적절하기에 동감하기가 쉬운데 다음과 같은 대목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들을 재치있게 풀어가고고 있는 부분이다. 

 대부분의 아이들을 괴롭히는 것은 같은 놈이었다. 바로 '그 집 아이'라는 놈이다. 그 집 아이는 대한민국 학생들의 공적이다. 그 집 아이는 공부 잘한다는데, 그 집 아이는 서울대 갔다는데, 그 집 아이는 상 받았다는데, 그 집 아이는 도무지 부모 속 썩이지 않는다는데, 기타등등 기타등등. 이런 식이다. (p.69)

하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 준호는 이런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아이다. 그는 그와 달리 공부를 아주 잘하는 서영이라는 여자 친구가 있고 '색'에 심하게 몰두하는 친구들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비행청소년과는 거리가 멀고 아버지가 없는 가정 즉 편모가정에서 자란 아이지만 자신의 어머니와 외삼촌을 호칭 대신 이름을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민주적인 가정에서 자라고 있다. 아무것도 강요받지 않는 아이인 준호는 아직 성인이 될 준비가 안된 아이이기는 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나는 평생 이 집에서 엄마랑 삼촌이랑 살았으면 좋겠어. 방이야 지금까지 있던 것이니 계속 쓴다고 해서 크게 손해볼 것도 아니고, 그저 밥상에 숟가락 하나만 더 놓으면 되는데, 그냥 그렇게 살면 안 될까? (p.138)

누가 보면 이 대사에서 드러나듯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아이이기는 하지만 준호는 어쨌든 성장해 나가고 그것은 자유가 넘치는 이 가정 속에서 자유롭게 생각해 나갈 수 있기에 가능하다.

결국 이 소설의 내용은 따지고 보자면 이런 준호가 겪어가는 '성의 여정'과 같은 형태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이 소설에서의 성애 묘사는 세 번 등장하고 그것은 일종의 성장으로서 상대를 존중하는 하나의 인격으로서 준호가 성장해 나가고 있음을 확인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박현욱은 특유의 재치있는 문체로 이런 성장담을 유쾌하게 풀어나간다. 준호의 성장의 일면을 보여주는 다음 부분은 이 소설이 단순히 유쾌하기만 한 소설은 아니라는 점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십대에 접어든 만큼 섹스에 관해서도 조금 어른스러워지기로 했다. 더이상 발정난 숫강아지처럼 서영이에게 깽깽거리지 말아야 겠다. 나는 이제 철없는 십대가 아니다. 하고 싶다고 해서 다 할 수 없는 것처럼 하기 싫다고 모두 마다할 수는 없다. 스물이 되고 싶지 않다고 해서 스물이 오지 않는 것이 아니듯 언젠가는 서른이 되고 또 금방 마흔이 될 것이다. (p.181)

그래서 이 소설의 첫부분과 마지막에 동시에 등장하는 '한 번 하자'라는 말은 동어반복이지만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소설의 처음에서 치기어런 집요함에서 나왔던 이 말은 마지막에서 이런 성숙의 과정 속에서 채 버리지 못한 치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변화하기 때문에 즐겁게 들린다.

박현욱 특유의 재치있는 문장들과 경박해보이지만 그렇게 경박하지만도 않은 <동정없는 세상>은 그런 점에서 매우 재미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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