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저, 황문수 역
문예출판사
대개의 현대인들이 그런 것처럼 대개 유명한 사람들의 책은 읽지 않고 이름만 아는 것이 보통이다.
에리히 프롬의 무척 많이 알려진 이 책 역시 그러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먼저 이 책의 제목은 말하자면 '낚시'다. 서문에서 에리히 프롬은 그런 오해를 우려한듯 점잖게 한마디 한다.
'사랑의 기술에 대한 편리한 지침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읽고 실망할 것이다. 사랑은 스스로 도달한 성숙도와는 관계없이 누구나 쉽게 탐닉할 수 있는 감상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려는 것이 이 책의 의도이기 때문이다.'(p.5)
뭐. 이름만 알뿐이지 에리히 프롬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으니 대략 유태계 독일계 미국인 '사회심리학자' 정도로 알자. 일단 프롬의 관심은 주로 '개인과 사회'에 있었고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명저를 통해 파시즘 현상에 대한 예리한 사회심리적인 분석을 해낸 바 있다. 또 이 양반이 유명한 것은 프로이드에 대해서도 날을 세운 비판을 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책은 이 질문에서 시작한다.
'사랑은 기술인가 ?'
프롬은 사실 이 책에서 현대인에게 사랑이란 무척이나 어려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적어도 그에게 있어 본능적인 사랑이라는 것은 일종의 병리학적 현상에 가까운 일이다. 그리고 그런 인간이 사랑에 집착하는 이유는 '분리'에 대한 불안 때문이며 이는 사회로의 융합의 갈망과 동의어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절실한 욕구는 이러한 분리상태를 극복해서 고독이라는 감옥을 떠나려는 욕구이다. 이 목적의 실현에 '절대적으로' 실패할 때 광기가 생긴다. 우리는 외부세계로부터 철저하게 물러남으로써 분리감이 사라질 때에 완전한 고립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에는 인간이 분리되어 있던 외부세계도 사라져 버린다. (pp.25~26)
대인간적 융합의 욕망은 인간의 가장 강력한 갈망이다. 그것은 가장 기본적인 열정이고 인류를, 집단을, 가족을, 사회를 결합시키는 힘이다. 이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발광 또는 파괴 - 자신의 파괴 또는 타인의 파괴 - 가 일어난다. 사랑이 없으면 인간성은 하루도 존재하지 못한다. (p.35)
이러한 융합에의 갈망은 대상을 자신의 일부분으로 보는 '공서적 합일'의 경향을 지니기도 하는데, 이는 어머니와 태아와 같은 정서적 연결성 속에는 납득이 가지만 매저키즘이나 새디즘 같은 경향 더 나아가 히틀러와 같은 새도매저키즘적 파시즘과 같은 양상을 띌 가능성도 지니고 있는 정서라고 프롬은 설명하고 있다. 프롬에게 있어 '사랑'은 좀더 중차대한 중요성을 지닌 것으로 설명된다.
공서적 합일과는 대조적으로 성숙한 '사랑'은 '자신의 통합성', 곧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 있어서의 합일'이다. 사랑은 인간에 있어서 능동적인 힘이다. 곧 인간을 동료로부터 분리시키는 벽을 허물어 버리는 힘, 인간을 타인과 결합시키는 힘이다. 사랑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립감과 분리감을 극복하게 하면서도 각자에게 각자의 특성을 허용하고 자신의 통합성을 유지시킨다. 사랑에 있어서는 두 존재가 하나로 되면서도 둘로 남아 있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p.38)
이렇듯 프롬에게 있어 '사랑'은 누군가를 소유한다는 욕망과는 떨어진 엄밀한 이성의 행위를 의미한다.
충분한 지식을 얻는 유일한 길은 사랑의 '행위'에 있다. 이 행위는 사상을 초월하고 언어를 초월한다. 사랑의 행위는 대담하게 합일의 경험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그러나 사고에 의한 지식, 곧 심리학적 지식은 사랑의 행위에 있어서 충분한 지식을 위해 불가렬한 조건이다. 다른 사람의 실상을 보기 위해서는, 오히려 내가 그에 대해 갖고 있는 환상, 곧 불합리하게 일그러진 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나는 다른 사람과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알아햐 한다. 인간을 객관적으로 알게 될 때에만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나는 인간을 궁극적 본질에 있어서 알 수 있다. (p.51)
인간의 본성 또 사랑을 분석하는데 있어 프롬은 프로이드가 지녔던 성적인 정신 분석을 비판한다.
남녀라는 양극성의 문제는 사랑과 성이라는 문제에 대한 더 많은 검토를 요구한다. 나는 전에 프로이트가 성욕을 사랑과 합일의 요구의 나타남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사랑에서 성적 본능의 표현 - 혹은 승화 - 만을 보려 한 것은 잘못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잘못은 더 심각한 것이다. 그의 생리학적 유물론과 일치하거니와, 그는 성적 본능을 몸 속에 화학적으로 생긴, 고통스럽게 해방을 갈망하는 긴장의 결과라고 본다. 성욕의 목적은 이 고통스러운 긴장을 제거하는 것이고 성적 만족은 이러한 제거에 성공하는 것이다. (p.55)
프로이트 이론에 대한 나의 비판은 그가 성을 과대평가했다는 것이 아니라 성을 충분히 깊게 이해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이다. 그는 대인관계에 있어서의 정열의 중요성을 발견하는 것으로 출발했다. 그의 철학적 전제에 따라 그는 이러한 정열을 생리학적으로 설명했다. 정신분석은 앞으로의 발전에 있어서 프로이트의 통찰을 생리학적 차원에서 생물학적 및 실존적 차원으로 옮겨 놓아 프로이트의 개념을 수정하고 깊게 할 필요가 있다. (p.58)
여전히 프롬에게 있어 '사랑'은 인간을 구원할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프롬이 제시하는 '사랑'은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결코 주고 받는 교환 가치로 평가될만한 것이 아니다.
어린애의 사랑은 '나는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원칙에 따르고 있고 성숙한 사랑은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받는다'는 원칙에 따르고 있다. 성숙하지 못한 사랑은 '그대가 필요하기 때문에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는 것이지만 성숙한 사랑은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p.62)
프롬은 흔히 절대적이라고 평가받는 '어머니의 사랑'을 절대성을 부정한다. 그에게 성숙한 사랑이란 오히려 성장기에 받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더로 다른 사랑들을 모두 지니고 있는 능력을 지녀야 한다.
결국 성숙한 사람이 되려면 자신이 자신의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되는 단계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말하자면 그는 어머니다운, 그리고 아버지다운 양심을 갖게 되어야 한다. 어머니다운 양심은 '어떠한 악행이나 범죄도 너에 대한 나의 사랑, 너의 삶과 행복에 대한 나의 소망을 빼앗지는 못한다'고 말하고 아버지다운 양심은 '네가 잘못을 저지르면 너는 네 잘못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을 피할 수 없고, 내 마음에 들고 싶다면 너는 너의 생활방식을 크게 바꾸어야 한다'고 말하낟.
성숙한 사람은 밖에 있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으로부터 해방되어 내면에 그 모습을 간직하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초자아의 개념과는 달라서 어머니와 아버지를 '편입'시킴으로써 내면에 그들의 모습을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사랑의 능력에 어머니다운 양심을 간직하고 자신의 이성과 판단에 아버지다운 양심을 간직함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이다. (p.66)
프롬의 이런 '성숙한 사랑'의 개념은 당연하게도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설정하는 태도 곧 '성격의 방향'이다.'(p.69)
그러므로 프롬이 지향하는 '사랑'은 다양한 형태의 것이다. 먼저 그가 긍정하는 것은 동등한 자들 사이의 사랑인 '형제애'다.
사랑의 모든 형태의 바탕에 놓여 있는 가장 기본적인 사랑은 '형제애'이다. 나는 형제애라는 말로 책임, 보호, 존경, 다른 사람에 대한 지식, 다른 사람의 생명을 촉진하려는 소망 등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성서에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종류의 사랑이다. (p.70)
이런 프롬의 관점에서 보자면 무력한 자에 대한 사랑인 '모성애'는 다소 위험할 수 있는 사랑이다.
모성애의 참된 본질은 어린애의 성장을 돌보아주는 것이며 이것은 그녀로부터 어린애가 분리되기를 바라고 있다는 뜻이다. 이 점에 성애와의 기본적 차이가 있다. 성애에서는 분리된 두 사람이 한몸이 된다. 모성애에서는 한몸이었던 두 사람이 분리된다. 어머니는 어린애의 분리에 관용할 뿐 아니라 바라고 후원해 주어야 한다. ... 중략.. 또한 이 단계에서 많은 어머니들은 모성애라는 그들의 과업에 실패를 겪는다. 자아도취적이고 지배욕과 소유욕이 있는 여자는 어린애가 연약할 때에만 '사랑하는' 어머니로서 성공할 수 있다. (p.76)
그리고 프롬은 '성애'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프롬은 '성애'와 '사랑'은 다른 것이라는 지적을 한다.
성적 욕망은 강렬한 정서와 쉽게 뒤섞이고 강렬한 정서에 의해 쉽게 자극되고 사랑은 강렬한 정서의 한 종류에 지나지 않게 된다. 성적 욕망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사랑이라는 관념과 짝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육체적으로 서로를 원할 때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기 쉽다. (p.79)
성애에는, 형제애와 모성애에는 없는 독점욕이 있다. 성애의 이러한 배타적 성격은 좀더 검토할 필요가 있다. 흔히 성애의 독점욕은 소유적 애착으로 오해되고 있다. (p.80)
프롬은 이런 '성애'라는 격정적인 감정 안에서 사람들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오인한다고 지적한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의지'다.
우리는 성애의 중요한 요인, 곧 '의지'라는 요인을 무시하고 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강렬한 감정만은 아니다. 이것은 결단이고 판단이고 약속이다. 만일 사랑이 감정일 뿐이라면, 영원히 서로 사랑할 것을 약속할 기반은 없을 것이다. (p.81)
이렇게 사랑의 종류를 분석해 가면서 프롬이 도달한 곳은 '자기애'다. 우린 일반적으로 '자기애'를 '이기심'과 혼동하기 쉽고 칼뱅 역시 자기애에 대해 '페스트'라고, 프로이트는 '자아도취'라고 생각할 정도로 서구에서도 비판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프롬은 자기애를 그렇게 폄하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과 우리 자신에 대한 사랑은 양자택일적인 것이 아니다. 반대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태도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발견될 것이다. '대상'과 '우리 자신의 자아' 사이의 관련이 문제되는 한, '사랑'은 원칙적으로 '불가분의 것'이다. 순수한 사랑은 생산성의 표현이고 보호, 존경, 책임, 지식을 의미한다. 순수한 사랑은 누군가에 의해 야기된다는 의미에서의 '감정'이 아니라 사랑받는 자의 성장과 행복에 대한 능동적 갈망이며, 이 갈망은 자신의 사랑의 능력에 근원이 있다. (pp. 84~85)
이기심과 자기애는 동일한 것이기는커녕, 사실상 정반대되는 것이다. 이기적인 사랑은 자기 자신을 엄청나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사랑하지 않는다. 사실상 그는 자기 자신을 미워한다. (p.86)
자기애에 대한 이러한 사상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이 문제에 대한 다음과 같은 말에 가장 잘 요약되어 있다. "만일 그대가 그대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대는 모든 사람들을 그대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할 것이다. 그대가 그대 자신보다도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는 한, 그대는 정녕 그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한다면, 그대는 그들을 한 인간으로 사랑할 것이고 이 사람은 신인 동시에 인간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 다른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위대하고 올바른 사람이다. " (p.89)
프롬은 이런 식으로 자신의 영역 내에서 사랑을 해체해 나간다. 그에게는 '신에 대한 사랑은 인간에 대한 사랑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다른 성질과 측면을 갖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발견되는 차이도 대체로 인간에 대한 사랑의 차이와 동일하다.'(p.90)
프롬에게 있어서 대부분의 신에 대한 사랑은 '신을 아버지로 자신을 어린애로 설정한' 유아적 단계를 극복하지 못한 종류의 것이다. 즉 이런 신에 대한 사랑은 '도움을 주는 아버지에 대한 신앙'인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내 자신의 이해도가 그리 높지 않은 편이다. )
이 지점에서 프롬은 '사회 구조'에 의해 사랑의 형태가 달라진다는 '사회 결정론'의 모습을 지적한다.
만일 사회구조가 권위-공공연한 권위, 또는 시장과 여론의 익명의 권위-에 복종하는 사회 구조라면 그의 신에 대한 개념은 유치하며, 성숙한 개념에는 훨씬 미치지 못한다. 성숙한 개념의 씨앗은 일신론적 종교의 역사에서 발견된다. (p.111)
결국 프롬이 이 책에서 전개하는 다양한 사랑에 대한 탐구는 다시 '현대에는 사랑이 가능한가 ?'라는 문제로 귀결되어 간다.
이 속에서 프롬이 발견하는 것은 근대 자본주의는 '사랑'이 존재하기 어려운 사회다.
그건 자본주의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간의 형태는 조직의 작동 원리에 충실하고 기계적인 소비에 집착하는 일종의 '자동 기계'들이기 때문이며 '개인'이라는 존재는 멸종되어가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자기 자신, 동료,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소외왼다. 그는 상품으로 변하고 자신의 생명력을 현재의 시장의 조건 밑에서 얻을 수 있는 최대의 이익을 가져오는 투자로서 경험한다. 인간관계는 본질적으로 소외된 자동기계의 관계이고, 각자는 군중과 가깝게 함으로써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고, 따라서 사상이나 감동이나 행동에 있어서 군중과 다른 점이 없다. (p.118)
이 책의 세번째 장인 '현대 서양사회에서의 사랑의 붕괴'는 위의 글처럼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의 인간의 부재를 증명하고 있는 장이다.
물론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프롬은 '사랑'의 중차대함을 잊지 않고 '사랑의 기술'을 배울 필요가 있음을 역설한다.
사랑의 기술에 대해서는 이 말은, 이 기술분야에 명장이 되려는 야망을 가진 사람은 누구든지 생활의 모든 국명을 통해 훈련, 정신 집중, 인내를 '실행'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p.147)
프롬은 물론 현대 자본주의 사회 또 러시아 공산주의 사회 모두 '경쟁의 모델'이 되는 인물들에 대해서는 회의한다. 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슈바이처'같은 인물이 유명해질 수 있었다는 점을 주목하며 희미한 희망을 품는다.
그리고 사랑에 요구되는 성질들을 제시한다.
곧 사랑은 자아도취의 상대적 결여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사랑은 겸손, 객관성, 이성의 발달을 요구한다. 우리는 이러한 목적에 전생애를 바쳐야 한다. 겸손과 객관성은, 사랑이 그런 것처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나는 이방인에게 객관적일 수 없는 한, 나의 가족에 대해서도 참으로 객관적일 수 없으며, 역도 진이다. (p.158)
그리고 다소 엉뚱하게도 '신앙'이 중요한 요소임을 말한다. 물론 프롬이 말한 '신앙'은 신에 대한 믿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단어로는 '믿음'의 아주 강한 표현에 가깝다. 프롬이 말한 '신앙'은 '비합리적 신앙'을 배제한 '합리적 신앙'을 말한다. 먼저 둘의 차이를 보면
비합리적 신앙이라는 말을 나는 불합리한 권위에 대한 복종을 바탕으로 하는 (어떤 사람 도는 관념에 대한) 믿음이라고 이해한다. 반대로 합리적 신앙은 자기 자신의 사고나 감정상의 경험에 뿌리박고 있는 확힌이다. 합리적 신앙은 원래 어떤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우리의 확신이 갖고 있는 확실성과 견고성이다. (p.159)
즉 프롬이 말하는 '신앙'이라는 이성적인 능력에 기반한 믿음과 같은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신앙은 약속할 줄 아는 능력의 조건이고, 니체가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약속할 줄 아는 능력에 의해 규정될 수 있으므로, 신앙은 인간의 실존의 한 조건이다. 사랑과 관련해서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사랑에 대한 믿음, 곧 다른 사람에게서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능력과 그 신뢰성에 대한 신앙이다. (p.162)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런 보증 없이 자기 자신을 맡기고 우리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을 받는 사람에게서 사랑을 불러일으키리라는 희망에 완전히 몸을 맡기는 것을 뜻한다. 사랑은 신앙의 작용이며 따라서 신앙을 거의 갖지 못한 자는 거의 사랑하지 못한다. (p.166)
자 이제 결론
사랑은 오늘날의 서양사회에서는 필연적으로 주변적 현상이다. 여러 가지 직업이 사랑하는 태도를 허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생산 중심의 상품에 탐욕스러운 사회의 정신은 이러한 정신에 동조하지 않는 자들만이 이 정신에 맞서서 성공적으로 자기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랑을 인간의 실존의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합리적 대답으로 보고 사랑에 진지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사랑을 매우 개인주의적인 주변적 현상이 아니라 사회적 현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의 사회구조의 중요하고 급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pp. 171~172)
인간의 사회적이고 사랑할 줄 아는 본성이 그의 사회적 존재로부터 분리되지 않고 사회적 존재와 일체를 이루는 방식으로 사회가 조직되어야 한다. 내가 입증하려고 노력한 바와 같이, 사랑만이 인간의 실존의 문제에 대한 건전하고 만족스러운 대답이라면, 상대적으로나마 사랑의 발달을 배제하는 사회는 인간성의 기본적 필연성과 모순을 일으킴으로써 결국 멸망하지 않을 수 없다. (p.172)
여기까지가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의 대략적인 정리 내용이다. 이 책에는 뒷부분에 '<해설>현대와 인간과 소외'라는 글이 부록으로 붙어있는데, 이 글의 내용이 대략적으로 에리히 프롬 전반에 관한 이야기에 도움을 준다. 그 부분에 대한 정리는 다시 다른 포스트를 이용하고자 한다.
책을 읽고 정리하는 차원에서 다시 한 번 타이핑을 처 보았는데, 솔직히 자신은 없다. 쩝...
*** 교육에 대한 인상적인 문구 : 교육과 조작
교육은 아동이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것을 도와준다.
교육과 반대되는 것이 조작이며, 조작은 이러한 가능성의 성장에 대한 믿음의 결여, 그리고 어른이 어린애에게 바람직하지 못한 것을 억압할 때 비로소 어린애는 올바르게 되리라는 확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로봇에게는 신앙이 필요하지 않다. 로봇에게는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p.162~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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