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고민하는 힘, 강상중 저, 사계절 Book



고민하는 힘
강상중 저, 이경덕 역
사계절

강상중이라는 이름은 역사나 재일동포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보던 이름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조금은 특이한 직업 설명이 붙는다. '동경대 교수'라는...
아니 '강상중'이라는 이름으로 '동경대'의 교수라니...
뭐, 그런 의문을 품고 있던 와중에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고민하는 힘>은 양적으로 그리 길지 않은 책이 아니다.
본문이래고 해 봐야 200페이지에도 훨씬 못 미치는, 거기에 비해 양장은 좀 과한 느낌의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의 내용만은 그리 만만한 것은 못된다.
강상중은 학자답게, 소소한 자기의 삶을 서술하는데는 만족하지 않는다.
그가 끌어들이는 인물들은 막스 베버와 일본의 대표적인 작가인 나쓰메 소세키다.
이 두 인물에 대한 경외감은 책의 전반부부터 확실히 전해진다.

 시대에 맞선 두 사람의 태도 또한 비슷합니다. 그것은 '시대를 받아들이자'는 각오와 비슷한 것입니다. 시대는 거친 격류처럼 흘러갑니다. 그 흐름을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 그 흐름에 올라타지만 그 흐름에 휘말리지 않고 시대를 꿰뚫어 보겠어.' 두 사람의 저작을 읽어 보면 이런 생각이 전해져 옵니다.
 나는 나쓰메 소세키와 막스 베버 두 사람을 '한 쌍'처럼 사랑해 왔습니다. 그리고 막스 베버의 '사회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또한 나쓰메 소세키의 '문학'을 통해 '근대'라는 것이 인간의 생활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를 배웠습니다. (pp. 21~22)

 저자는 이 두 사람의 틀을 빌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제기한다. '나는 누구인가?', '돈이 세계의 전부인가?', '제대로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청춘은 아름다운가?', '믿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을까?' 등의 장 제목이 그렇다. 

 그리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 대한 고민을 토해낸다. 고뇌하지 않는 현재의 젊음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는 다음과 같은 글이 그런 근심이다.  

 청춘은 아이에서 어른으로 변화하는 시기이며, 험준한 골짜기 위에 설치된 통나무를 '줄타기'처럼 건너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한 걸음만 잘못 떼어 놓으면 골짜기 아래로 추락하고 마는 위험한 시기입니다. (p.86)

 다음은 '죽음'의 문제에 대한 저자의 견해.

 우리는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없어"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것은 경제적-물리적 뒷받침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철학적 의미에서도 그렇습니다. 자아를 보존해 가기 위해서는 역시 타자와의 관계가 필요합니다. 상호 인정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상호 인정이 없으면 자아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p.151)

 전술하고 있는 것처럼 강상중의 글은 담백하고 원론적이며 신중하다. 
 각 장의 제목을 차지하고 있는 질문에 대하여, 강상중은 자신의 경험과 베버와 소세키를 빌어 이야기한다. 하지만 속 시원한 결론은 내놓지 않느다. 이 책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주제가 있다면, 책의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고민'의 필요성일 것이고 생각의 치열함일 것이다. 가벼워진 세계 속에서 우리는 어느덧 생각하기를 멈추고 실체 없는 무엇인가를 뒤쫓기 바쁠 뿐이다. 이 책은 그런 관성화된 우리들의 일상에 대한 작은 파문이 될 만한 책이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왠지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을 찾아 읽고 싶어진다.

덧글

  • 지성의 전당 2019/01/17 21:10 # 답글

    안녕하세요.
    저는 지성의 전당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고민하는 힘 글이 있어서 댓글을 남겨 보았습니다.
    제가 또 댓글을 달았다면 죄송합니다.
    인문학 도서인데,
    저자 진경님의 '불멸의 자각' 책을 추천해드리려고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와 죽음에 대한 책 중에서 가장 잘 나와 있습니다.
    책 내용 중 일부를 아래 글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제 블로그에 더 많은 내용이 있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정보를 드리는 것뿐이니
    이 글이 불편하시다면 지우거나 무시하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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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식할 수가 있는 ‘태어난 존재’에 대한 구성요소에는, 물질 육체와 그 육체를 생동감 있게 유지시키는 생명력과 이를 도구화해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의식과 정신으로 나눠 볼 수가 있을 겁니다.

    ‘태어난 존재’ 즉 물질 육체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역할을 다한 도구처럼 분해되고 소멸되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육체를 유지시키던 생명력은 마치 외부 대기에 섞이듯이 근본 생명에 합일 과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육체와의 동일시와 비동일시 사이의 연결고리인 ‘의식’ 또한 소멸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에 보충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총체적 단절작용을 ‘죽음’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존재의 일부로서, 물질적인 부분은 결단코 동일한 육체로 환생할 수가 없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의식’ 또한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은 모든 물질을 이루는 근간이자 전제조건으로서, 물질로서의 근본적 정체성, 즉 나타나고 사라짐의 작용에 의한 영향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타날 수도 없고, 사라질 수도 없으며,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불멸성으로서, 모든 환생의 영역 너머에 있으므로 어떠한 환생의 영향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에 대한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자 실체로서, ‘있는 그대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체에 의한 작용과정으로써 모든 창조와 소멸이 일어나는데, 누가 태어나고 누가 죽는다는 것입니까?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을 하고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윤회를 합니까?

    정신은 물질을 이루는 근간으로서의 의식조차 너머의 ‘본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윤회의 영역 내에 있는 원인과 결과, 카르마, 운명이라는 개념 즉 모든 작용을 ‘본체’로부터 발현되고 비추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태어난 ‘한 사람’, 즉 육신과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진 ‘지금의 나’로 여기며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착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한 사람’은 스스로 자율의지를 갖고서,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한다고 믿고 있지만 태어나고 늙어지고 병들어지고 고통 받고 죽어지는, 모든 일련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어느 것 하나 스스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책임을 외면하기 위해 카르마라는 거짓된 원인과 결과를 받아들이며, 더 나아가 거짓된 환생을 받아들이며, 이 과정에서 도출되는 거짓된 속박, 즉 번뇌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환영 속의 해탈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거짓된 자기견해 속의 환생과 윤회는, 꿈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내리려면 반드시 비교 대상이 남아 있어야 하며, 대상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그 어떠한 자율성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는 꿈속의 꿈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뚜렷하고 명백하다 할지라도 ‘나뉨과 분리’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나’에 대한 그릇되고 거짓된 견해만을 바로잡았을 뿐입니다.

    https://blog.naver.com/ecenter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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